[런던=이데일리 김연지 기자] 런던 증권거래소 상장을 추진 중인 중국계 패스트패션 기업 ‘쉬인’이 기존 투자사들로부터 기업가치를 하향 조정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방국가의 정치 및 규제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만큼 쉬인이 기업공개(IPO)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업가치를 낮춰 일반 투자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본 것으로 분석된다. 높은 기업가치를 고집하다가 실패하느니 적절한 조정으로 상장 이후 장기적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노리자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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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현지 업계에 따르면 중국 쉬인은 기존 투자자들로부터 기업가치를 300억달러(약 43조원) 수준으로 낮춰 잡으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는 쉬인이 인정받은 역대 최고 기업가치인 1000억달러의 3분의 2 수준에도 못 미치는데다 쉬인이 최근 내건 기존 목표치에서 200억달러 가량 깎인 수준이다.
통상 투자 후 높은 차익을 노리는 투자사들 사이에서 이런 의견이 나올 수 있나 싶지만, 지난 3년간 크게 변화한 쉬인의 상황을 보면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우선 쉬인은 지난 2022년 제네럴애틀란틱과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 무바달라가 주도한 투자 라운드에서 약 1000억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금리 인상과 쉬인의 실적 둔화, 이커머스 시장 둔화, 미·중 갈등으로 인한 규제 리스크, 노동환경에 대한 유럽 규제 등의 이유로 쉬인은 2023년 프리 IPO 라운드에서 다운라운드(down round·이전 라운드 대비 기업가치를 낮춰 진행하는 자금 조달 라운드)를 진행, 650억달러(약 94조원)의 기업가치에 만족해야 했다.
쉬인이 제대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 개인이 수입하는 800달러 미만의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최소 기준 면세’를 폐지하고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10%의 추가 관세를 적용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최저가 판매로 해외 시장을 빠르게 점령한 쉬인이 글로벌 매출을 내기 어려워지는 구조를 만든 셈이다.
여기에 유럽에서는 쉬인의 재무적 불투명성과 취약한 노동 관행 등을 문제 삼으면서 관련 규제를 강화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자본시장에서 쉬인의 런던 증시 입성에 먹구름이 드리웠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유다.
쉬인에 일찍이 베팅한 투자자들은 속이 타들어가는 모양새다. 쉬인의 기업가치를 실현하는 동시에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쉬인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려면 증시 상장 외에는 답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낮은 가격으로 IPO를 성사시키면 긍정적인 주가 흐름을 만들면서 장기적으로 수익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글로벌 사업 운영 리스크와 서방 국가의 규제 강화에 따라 쉬인이 지금보다는 더 현실적인 기업가치로 IPO를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이유다.
쉬인이 기업가치를 낮춰잡고 IPO를 강행할지는 미지수이나, 업계에선 IPO 작업이 하반기로 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유럽의 벤처캐피털 한 관계자는 “싸고 다양한 제품을 빠르게 배송하는 쉬인의 비즈니스모델은 매력적”이라면서도 “시장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초기 공모가를 높게 책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쉬인은 글로벌 확장이 쉽지 않다는 단점을 가진 기업이기 때문에 지분 매각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일부 투자사는 프라이빗 형태로 쉬인의 지분을 (다른 투자사 및 기업에) 매각하려고 했으나, 시장에서 쉬인의 기업가치가 뚝 떨어지면서 철회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상 엑시트(자금 회수)를 하려면 증시 상장 외에는 시원한 답이 없는 셈”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