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박정수 기자]“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CIO)은 정치인을 뽑는 자리가 아니다.”
지난 19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공개모집 지원 마지막 날 한 연기금 CIO가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기금운용본부장 재공모에 나선 국민연금이 최우선으로 봐야 할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엉뚱하게도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이 이랬다. 기금운용본부장은 자질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국민연금이 CIO 선임 과정에서 정치적 외풍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 2월 진행한 CIO 모집에서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를 낙점해 놓고 형식만 공개모집 절차를 진행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이 곽 전 대표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추천했고, 이후 장 실장은 곽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면서 인사 개입 논란이 일었다. 무엇보다 김 이사장이 곽 전 대표를 인선 과정에서 따로 만나기까지 해 인사 논란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3개월여의 인사검증 과정에서 국민연금은 ‘적격자가 없다’며 지난 6일 재공모에 착수했다. CIO 선임 전부터 낙점해 놨던 곽 전 대표를 미국 국적 포기과정에서 3주 민방위 훈련으로 마무리한 병역 문제가 야당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청와대 내부 판단에 따라 선임을 포기한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다. 특히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따른 의결권 행사시 정치적 입김이 스며들 통로가 여전히 많은 상황이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두고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며 가입자대표 추천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의결권전문위원회를 확대·개편한 것으로 정부 인사는 배제하기로 했다. 하지만 원활한 운영을 빌미로 수탁자책임전문위 사무국 격인 간사 역할을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재정과장과 기금운용본부장에 맡겼다. 의결권 행사 등의 실무를 고려했다고는 하나 정부의 인사를 배제했다고 보기에는 탐탁지 않다.
업계에서는 기금운용본부장이 자율적인 결정권을 갖기 위해선 기금운용본부를 복지부에서 떼어내야 한다는 지적을 수없이 해왔다. 또 현재의 구조로는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간섭할 여지가 큰 만큼 일본과 같이 의결권 행사를 외부에 맡기라고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국민연금이 외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유지한다면 기금운용본부장 자리는 앞으로도 ‘독이 든 성배’로 여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