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이데일리 김연지 기자] 2014년 겨울. 영국의 한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한 학생은 팀 프로젝트로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펜을 개발한다. 손의 뻣뻣함을 줄이는 특수 진동 기술이 적용된 이 펜은 영국 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밀한 손 동작을 보조하는 파킨슨 환자 전용 도구가 전무했던 가운데 글씨를 쓰는 동작만으로 증상이 완화되는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품을 사용해본 환자들에게서는 제품 출시를 요청하는 이메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 학생은 프로젝트가 단지 ‘학업의 일환’이었던 만큼, 제품화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 학생은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병원 생활을 시작했고, 5년 가까운 투병 기간 동안 생의 경계에 서서 불안함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언제쯤 이 병실을 떠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던 그는 문득 런던에서 만든 펜을 떠올리고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던 기술을 연구실에 고스란히 묻어두고 나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단 1%라도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렇게 오랜 치료를 마친 후 다시 영국으로 향한 그는 이 기술을 꺼내 들었고, 그로부터 수년 후 글로벌 투자사들이 눈독을 들이는 영국의 대표 디지털 의료기기 기업을 세웠다.
 | 샤코뉴로텍을 설립한 루시 정(정수민) 대표./사진=임페리얼칼리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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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보다 가치를 우선시했더니 모든 것이 따라왔죠”영국에서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디지털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샤코뉴로텍의 루시 정(정수민) 대표 이야기다. 고려대학교에서 산업정보디자인을 전공한 정 대표는 지난 2013년 영국으로 건너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과 왕립예술대학에서 공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이후 2019년 케임브릿지대학교 비즈니스스쿨에 진학해 공부를 이어갔고, 파킨슨 증상 완화 의료기기 스타트업 ‘샤코뉴로텍’을 공동 창업했다.
파킨슨병은 중추신경계의 퇴행성 질환으로, 주로 운동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을 만드는 세포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발생하며, 주요 증상으로는 글씨가 작아지는 소필증과 떨림, 근육 경직, 서동증, 자세 불안정성 등이 있다. 치료는 기본적으로 약물치료를 실시하고, 근본적인 치료 약물은 아직 연구 단계에 있다.
정 대표가 수많은 질환 중 파킨슨을 겨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파킨슨병은 일상의 자율성을 급격히 무너뜨리는 질병으로, 60세 이상 인구의 1%, 80세 이상 인구의 4%가 앓고 있다”며 “세계적으로 환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기술로 이들의 일상을 되찾아줄 수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샤코뉴로텍이 그렇게 개발한 디지털 의료기기는 ‘큐1’으로, 말초신경 자극을 통해 파킨슨병 환자의 이상 증상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환자의 흉부에 부착하면 보행 중 서동, 경직, 동결 등 파킨슨병의 주요 증상이 개선되는 식이다. 회사는 혁신성을 인정받아 지난 2021년 1000만달러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고, 현재는 미국 의료기관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샤코뉴로텍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정 대표는 ‘기술보다 사람과 가치를 우선시한 덕분’이라고 답했다. 그는 “우리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파킨슨 환자들이 남과 다르지 않은 일상생활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며 “상업성이 낮더라도 환자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파킨슨 넘어 정신질환까지 확장…새 시작 선언디지털헬스케어 시장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가운데 샤코뉴로텍이 유럽의 주요 벤처캐피털(VC)로부터 투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 대표는 “수년간의 연구를 기반으로 환자에게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살려주는 제품을 개발한 덕”이라며 “원래 잘 움직이지 못했던 사람에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경험은 기술보다 더 큰 본질적 가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해당 제품을 연구하고 적용하면서 유의미한 임상 데이터가 나왔고, 투자사들은 우리가 개발한 디지털 의료기기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부연했다.
펀드레이징 시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있느냐고 묻자 정 대표는 “샤코뉴로텍의 제품이 ‘파킨슨 병에 대한 희망’이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이게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개발한 기기는 단순히 진동만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 개개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며 “이러한 점에서 샤코뉴로텍의 디지털 의료기기는 단순 의료기기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최근 라이온즈라는 새 회사를 설립하면서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그는 “환자들을 중점적으로 보는 동시 과학 기반의 의료기기 혁신에 집중해 많은 파킨슨 환자를 도울 수 있었다”며 “현재 정신 건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인지하고 라이온즈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라이온즈는 신경기술 스타트업으로 불안과 우울증, 수면장애 등 신경계 기반의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침습적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주요 제품으로는 감각 자극을 통해 자율신경계를 조절, 불안과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디바이스가 있다.
정 대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장애를 겪고 있고, 이는 또 다른 신경계 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공황장애가 치매나 파킨슨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연구도 나오는데 우리는 이걸 하나의 연결된 흐름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제품 개발뿐 아니라, 교육 콘텐츠, 사용자 경험 설계, 공공 인식 개선 등 다방면에서 솔루션을 찾고 있다”며 “기술과 인간 중심의 가치가 조화를 이루는 혁신적인 사례를 또 한번 만들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