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지영의 기자]“왜 고점에서 팔지 않았나” 지수가 꺾이자마자 국민연금을 겨냥한 뒤늦은 질타가 쏟아진다. 수백조 원의 평가이익에 환호하던 시장은 어느새 ‘240조 원 증발’이라는 허구와 공포가 뒤섞인 프레임을 씌우며 운용 실패론을 부각하고 있다. 올해 단행된 리밸런싱 유예와 목표 비중 상향 조치가 타당했는지는 재점검이 필요한 사안이나, 주가가 올랐을 때 침묵하다가 떨어지니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몰아세우는 식의 평가는 본질을 흐린다. 국민연금에 요구되는 역량은 시장의 고점과 저점을 맞추는 ‘단타 고수’가 아니다. 단기적 충격과 외부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켜내는 것이 국민연금의 역할이다.
자산가치 하락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지만, 이를 곧바로 운용 실패로 몰아가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다. 최근 논란이 된 수백조원대 감소액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의 전체 기금 적립금은 지난 7월 한 달간 181조4000억원 감소했다. 그러나 적립금 증감에는 국내외 주식·채권 등 자산가격과 환율 변동, 보험료 유입과 연금 지급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민간 추정치인 182조원은 이와 다른 숫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국민연금의 지분 5% 이상 보유 사실이 공시된 상장사 287곳을 대상으로 집계한 결과, 국민연금 보유주식의 평가액이 6월 말부터 10월 15일까지 182조4000억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해당 기업들의 시가총액 전체가 줄어든 금액이 아니라
국민연금이 보유한 지분의 추정 평가액 감소분이다. 주가 변동뿐 아니라 보유 지분의 증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집계 기간과 대상이 다른 두 숫자를 혼용하거나, 일부 보유주식의 평가액 감소를 전체 기금의 운용손실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통계의 의미를 잘못 읽은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시장의 단기 변동에 따라 국민연금을 재단하는 잣대 자체가 흔들리는 경향이 생겼다는 점이다. 주가가 치솟을 때는 불어난 평가이익을 운용 전반의 성과로 포장하고, 반대로 하락세가 찾아오면 즉각 책임을 추궁한다. 상승장이 만들어낸 자산가치 폭등을 전적으로 운용 역량으로 볼 수 없듯, 하락장의 평가손실 역시 전부 운용 실패라 단정할 수 없다.
국민연금의 본질은 단기 차익을 추구하는 투기적 자금이 아니다. 수십 년 뒤 가입자에게 지급할 연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 채권, 대체투자 전반에 자금을 배분하는 장기 투자 기관이다. 국민연금이 3년~5년 이상의 장기 성과평가를 원칙으로 삼고, 벤치마크(BM) 대비 초과 성과와 위험관리 지표를 함께 점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 시점에 얼마를 벌었느냐보다 장기적으로 어떤 위험을 감수해 얼마의 수익을 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기투자 기관에 시장의 고점과 저점을 모두 맞춰 즉각 매매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지수 상승기에는 국민연금의 대규모 매도가 시장을 억누른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하락기에는 왜 고점에서 매도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이 이어진다. 국민연금이 증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과 증시의 등락을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기금이 아니다.
장기투자라는 이유로 국민연금의 모든 결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올해 국내주식 리밸런싱을 한시적으로 유예하고 목표 비중을 14.9%에서 20.8%로 높인 결정은 충분히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국내 증시의 구조적 변화와 장기 기대수익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위험을 감수할 만한 판단이었는지 검증해야 한다. 다만 주가가 계속 올랐다면 잘한 결정이고 이후 떨어졌으니 잘못된 결정이라는 식의 잣대를 들이미는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투자 원칙은 시장 상황에 맞춰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지만, 단기적인 주가 움직임만을 따라가며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민연금은 올해 말 전략적 자산배분(SAA) 허용범위 재점검과 내년 상반기 중기자산배분안 수립이라는 중대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몇 달 새 평가액이 얼마나 증발했는지를 따지는 소모적 공방이 아니라, 향후 5년 이상의 자산배분 원칙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실효성 있는 논의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을 엄정하게 평가하는 일과 단기 손익을 부풀려 기금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키우는 일은 다르다. 정작 따져야 할 운용 원칙이 숫자 공방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
투자 판단에는 합리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시장 등락에 휩쓸려 원칙을 흔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국민연금은 정부의 경기 부양 자금도, 매일 등락을 겨루는 단타 계좌도 아니다. 일일 주가지수와 단기 평가손익에 매몰돼 운용 원칙이 흔들리는 순간, 수십 년 뒤 국민의 노후를 지탱할 마지막 보루마저 위태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