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윤지 기자] 북한의 가상자산 해킹은 제재로 막힌 외화 조달 통로를 뚫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 보복 성격의 기업 공격에서 은행 자금 탈취로, 다시 거액의 고객 자산이 모인 거래소로 공격 범위를 넓혔다. 직원과 외부 프로그램의 빈틈을 파고들어 훔친 돈은 핵·미사일 개발로 흘러들어 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북한에 대해 “외부 세계와 단절됐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공격 주체 중 하나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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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북한 해킹 조직 ‘트레이더트레이터’가 바이낸스에서 발생한 63억달러(약 8조4155억원) 이상 가상자산 탈취 사건의 배후라고 공식 발표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북한 해킹조직의 위협을 세계에 각인한 사건은 2014년 소니픽처스 공격이다. 소니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뷰’를 준비하자 해커들은 내부 전산망에 침입해 임직원 급여 정보 등을 유출했다. 2016년 방글라데시 중앙은행 사건에서는 금융거래 절차를 악용했다. 해커들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지급 메시지 시스템을 이용해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예치한 방글라데시 중앙은행 자금 약 10억달러(약 1조3358억원)를 빼내려 했다. 이체 요청에 적힌 철자 오류가 의심을 불러 추가 인출을 막았지만 8100만달러(약 1082억원)는 이미 사라졌다. 특정 은행에 맞춘 악성코드를 직접 제작해 기존 보안 프로그램의 탐지를 피한 점도 특징이다.
이후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은 북한의 새로운 표적이 됐다. 코로나19 국경 봉쇄로 기존 외화벌이가 어려워지고 은행들이 보안을 강화하자 북한은 가상자산 거래소 공격에 힘을 쏟았다. 국경을 넘지 않고 거액을 확보할 수 있고, 여러 지갑으로 자금을 옮겨 추적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어서다. 2022년에는 블록체인 게임 액시 인피니티에서 6억2000만달러(약 8282억원)를 탈취했다. 공격 대상이 은행 계좌에서 게임과 연결된 가상자산까지 넓어진 것이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는 “북한이 중국어권 자금세탁 서비스와 여러 블록체인을 연결하는 서비스를 활용해 자금 흐름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2월 바이비트에서 발생한 15억달러(약 2조원) 탈취는 공격 방식의 변화를 드러냈다. NYT에 따르면 북한 해커들은 거래소가 사용하던 무료 소프트웨어를 악용해 벤 저우 최고경영자(CEO)가 정상적인 거래로 오인하고 승인하도록 유도했다.
사이버보안 기업 소포스의 레이프 필링 위협연구 선임디렉터는 “북한 해킹 조직이 기업의 시스템과 직원들이 자금 이체를 승인하는 방식을 파악하는 데 능숙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흐름은 앞으로도 가상자산 거래소와 고객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수탁업체가 주요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FT는 북한이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을 선발해 전문적인 ‘사이버 전’ 교육을 한다고 전했다. 일부 정예 요원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추가 훈련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인권위원회는 올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평양 모란봉대학이 군사학과 해킹, 암호 해독을 결합한 5년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사이버 작전에는 지원 인력을 포함해 약 8400명이 관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은 “북한 해커들은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숙련된 사이버 행위자다”며 “국내에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외국 기관을 적극적으로 표적 삼아 해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해킹 규모는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체이널리시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가상자산 탈취 규모는 2024년 13억4000만달러(약 1조7000억원)에서 지난해 20억2000만달러(약 2조6983억원)로 불어났다. 2024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전문가 패널은 2017~2023년 북한의 사이버 공격을 통한 수입이 전체 외화 수입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북한은 탈취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무기 개발에 활용하고 핵·미사일 프로그램 비용의 약 40%를 충당한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자금의 군사적 용도는 핵·미사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마이클 반하트 DTEX 연구원은 “북한의 드론 프로그램 발전도 해킹과 해외 IT 인력의 수익 활동에 직접 연결돼 있다”며 “가상자산 해킹은 국가안보 문제이고 피해 거래소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