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상장할 자유, 주주에게 답할 의무
등록 2026-10-20 오후 10:08:04
수정 2026-10-20 오후 10:09:16
[이데일리 마켓in 권소현 기자]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가 고연봉 변호사가 된 딸이 있다고 치자. 그런 딸에게 명문 재벌가로 시집갈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집안 어른들은 이 딸의 결혼을 반대한다. 시집가지 말고 혼자 살면서 꼬박꼬박 용돈이나 보내라는 것이다.”
SK그룹의 솔리다임 미국 증시 상장 추진을 둘러싼 논쟁을 두고 한 자본시장 관계자가 내놓은 비유다. 딸(솔리다임)이 더 큰 살림을 꾸릴 기회(나스닥 상장)를 얻었는데 왜 반대하냐는 것이다. 상장에 앞서 진행 중인 프리IPO에 국내 사모펀드는 물론이고 보험사, 증권사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용 고용량 SSD 시장의 성장 전망이 솔리다임의 기업가치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의 시선은 다르다. SK하이닉스가 지배하는 손자회사 솔리다임이 미국 증시에 별도로 상장하면 기존 주주가 누리던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다. 최근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적용 대상이라는 취지로 발언한데 이어 여야 의원들도 이를 이슈화하며 논란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2022년 LG화학이 배터리 사업부를 물적분할한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하면서 모회사 주가 폭락을 경험한 이후 국내 증시에서 중복상장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이슈로 자리잡았다. 자회사 성장 과실을 모회사 주주와 나누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그때와 달라진 점은 금융당국이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지난 8월 시행된 가이드라인은 자회사 상장을 ‘원칙 금지, 예외 허용’으로 묶으면서 해외 거래소 상장에도 모회사 이사회의 5대 의무를 그대로 적용했다. 주주 영향평가, 보호방안 마련, 주주 소통과 동의 확인, 이사회 찬반 결의, 단계별 공시다. 거꾸로 말하면 이 절차를 충실히 밟으면 길은 열려 있다는 뜻이다.
중복상장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당국이나 정치권에서 미리 단정할 일은 아니다. 이사회가 상장의 필요성과 주주 영향을 검토하고, 주주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사안이다. AI 메모리 경쟁에 수십조원의 투자 재원이 필요하다는 회사 측 논리도 가볍게 볼 수 없다. 당국의 역할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절차와 심사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살피는 데 있다.
다만 ‘기업에 맡기라’는 말은 기업이 증명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SK가 내놓은 설명은 “확정된 바 없다”는 입장에 머물러 있다. 주주가 판단할 재료가 없다.
특히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주 간 부의 이전 가능성은 해소하고 넘어가야 한다. SK하이닉스는 기존 솔리다임 법인을 중간지주사 AI컴퍼니로 바꾸고 사업은 그 아래 신설 솔리다임으로 옮겼다. 이어 SK㈜·SK이노베이션·SK텔레콤이 AI컴퍼니에 11억1000만달러를 출자하기로 약정했다.
한국거버넌스포럼이 문제 삼는 지점이 여기다. 상장 기대감이 반영되기 전 계열사들이 지분을 확보했다면, 솔리다임 상장으로 높아지는 AI컴퍼니의 가치가 SK하이닉스보다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계열사에 더 유리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 주주들이 위험을 감수하며 키운 자산의 과실이 다른 계열사로 더 많이 귀속되는 구조라면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물론 실제 부의 이전이 발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계열사 간 공동투자가 사업적 판단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투자 가격과 지분 구조, 상장 후 가치 배분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계열사 출자 가격이 공정했는지, 각 회사가 부담한 위험과 기대 수익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SK가 내놔야 할 답은 분명하다. 우선 솔리다임 상장 대상과 방식이다. 신주 발행인지 구주 매출인지, 조달 자금은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돈 잘 버는 SK하이닉스의 직접 지원 대신 상장을 고민하는 이유는 뭔지 설명해야 한다.
계열사 출자 가격의 공정성도 입증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독립적인 외부 평가를 공개하고, 기존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보완책도 제시해야 한다. 상장으로 SK하이닉스 주주들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상장설이 처음 보도된 날 SK하이닉스 주가는 하루 만에 10% 넘게 빠졌다. 시장은 이미 의구심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솔리다임 상장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또 다른 사례로 남을지, 주주 보호를 전제로 성장을 이룬 사례가 될지는 SK가 얼마나 투명하게 답하느냐에 달렸다. 공은 SK하이닉스 이사회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