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김연지 기자] “로켓배송 없이 어떻게 살지?”
한동안 국내 자본시장은 쿠팡을 두고 이런 농담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았다. 투자설명회에서도 ‘한국판 아마존’같은 수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나중에는 실적도 이러한 시장 기대를 뒷받침했다. 실제 쿠팡은 올해 2분기 85억달러(약 12조 5000억원)의 매출과 32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체질 개선 흐름을 이어갔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쿠팡에서 3370만개 계정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성장성과 실적 개선을 동시에 보여주며 ‘플랫폼의 겨울은 끝났다’는 평가까지 받던 업종이 한순간에 신뢰 이슈로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이다.
 |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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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0만명 털렸다”…쿠팡에 찾아온 긴 겨울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쿠팡에서 유출된 고객 계정은 현재까지 3370만개다. 국내 성인 4명 중 3명 정보가 노출된 셈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활성 계정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도 합동 조사단을 꾸리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개인정보보호위원회·경찰청은 합동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돌입했고, 경찰은 중국 국적의 전직 직원 등을 중심으로 이메일·IP 추적에 나선 상태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피해 규모가 약 3400만건에 달하는데도 회사가 5개월간 유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며 “AI·디지털 시대의 핵심 자산인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관행을 이번 기회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징금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 현실화 등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민간·공공 전반에 걸친 새로운 디지털 보안 제도 역시 신속히 준비하라”고 주문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쿠팡 하나의 악재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랫폼이라는 동일 카테고리에 묶여 있는 타 이커머스·O2O 스타트업들도 함께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받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어렵사리 되살린 성장 스토리가 이커머스 1위 기업의 보안·거버넌스 이슈에 흔들리게 된 셈이다.
사실 지난 몇 년간 플랫폼 업종은 유동성 축소와 함께 ‘성장성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업종’으로 평가가 빠르게 바뀌었다. 유동성이 넘쳤던 지난 2020년~2021년엔 거래액과 이용자 증가만으로도 수조원대 밸류에이션이 가능했지만, 유동성이 마르자 수익성·현금흐름·리스크 관리 같은 기초 체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투자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성장성 보여줬더니…이젠 “시스템과 거버넌스 추가”그러다 쿠팡의 흑자 기조와 마켓컬리의 수익성 회복 기대가 맞물리며 업종 전반이 재평가 국면에 진입하는 듯한 흐름이 감지됐다. 이에 일각에선 이커머스 플랫폼들이 생존력을 증명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쿠팡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터졌고, 이는 곧 시장에 새로운 기준을 던졌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플랫폼 투자의 중심은 △매출 성장률 △거래액(GMV) △활성 이용자 수 등 외형 지표에 맞춰져 있었지만, 이제는 보안·내부통제·지배구조까지 평가 테이블에 함께 올라온 상황이다.
특히 이번 사태는 쿠팡의 지배구조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게 했다. 미국 델라웨어에 설립된 지주회사가 한국 사업을 지배하는 구조와, 김범석 의장이 보유한 클래스B(1주당 29표) 의결권 체계는 위기 상황에서 책임과 권한의 경계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자본시장에선 이번 사태가 플랫폼 업종에 대한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이미 플랫폼 밸류에이션이 재조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안·내부통제 리스크까지 부각되면서 투자자들의 선택 기준이 더 까다로워졌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국내 VC 업계 한 심사역은 “시가총액이 크더라도 이러한 사태가 또 벌어질 수 있는 구조인가에 대해 답하지 못하면 과거같은 밸류에이션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특히 이사회 구성과 내부통제 라인, 리스크 관리 체계 등 비재무적 요소가 그동안 과소평가돼 온 것도 사실이라, 실적이나 성장률이 괜찮더라도 리스크 관리 체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신규 투자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