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신수정 기자]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과 시장경쟁을 중시하던 기존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산업보조금 확대와 역내 기업 보호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국가 주도 산업정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시장 자율성을 강조하며 프랑스에 반대했던 독일마저 산업보호에 동참하면서 EU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다.
 | |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높은 생활비’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되기 전 발생한 충돌 도중, 프랑스 국기를 흔들며 불길 옆을 지나가는 시위대. (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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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현지시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가 국내 정치적 혼란에도 EU 경제정책에 대한 영향력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랑스 정부가 수십 년간 주장해 온 국가 주도 산업정책과 경제적 자립 구상이 브뤼셀의 주요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산업정책이다. EU는 과거 회원국 정부가 특정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행위를 엄격히 제한했다. 국가 개입을 선호하는 프랑스와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독일의 입장이 충돌하면 대체로 독일의 시장 중심 접근법이 우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프랑스가 주창한 산업 보호와 전략적 자율성이 EU 정책의 중심 의제로 떠올랐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월 ‘산업가속화법(Industrial Accelerator Act)’을 제안했다. 공공조달과 정부 지원사업에서 유럽산 제품을 우대해 역내 제조업을 육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법안은 현재 EU 차원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프랑스 출신인 스테판 세주르네 EU 집행위원회 산업전략 담당 부집행위원장은 ‘메이드 인 유럽(Made in Europe)’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부 예산으로 제품을 구매하거나 기업을 지원할 때 유럽 내 생산 여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한때 보호무역주의라며 반대했던 독일도 입장을 바꾸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독일 자동차 산업을 위협하고 미국이 자국 산업 지원을 강화하면서 유럽 기업을 보호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난 16일 유럽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위한 공동 대응 방안에도 합의했다. 전기차 개발과 생산을 유럽 내에서 확대하고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지원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다만 유럽산 제품의 인정 범위를 놓고 이견은 남아 있다. 프랑스는 EU 회원국 중심의 엄격한 기준을 선호하지만 독일은 영국과 캐나다 등 주요 교역 상대국까지 포함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산업 보호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보호 범위와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배경으로 잇따른 국제적 충격을 지목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에 과도하게 의존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드러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이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중국의 핵심 원자재 공급망 장악과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도 유럽의 정책 전환을 재촉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19년부터 유럽이 미국과 중국에 종속되지 않는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는 지나친 국가 개입론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제 정세가 달라지면서 EU 내부의 공감대가 확대됐다.
영국의 EU 탈퇴도 프랑스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은 과거 EU 내에서 자유무역과 시장경쟁을 옹호하며 프랑스식 산업정책을 견제하는 주요 국가였다.
프랑스의 대외 영향력 확대는 국내 경제 상황과 대조적이다. 프랑스에서는 재정적자 감축을 둘러싼 갈등과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119%에 달하며, 21일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2002년 이후 처음으로 5%를 넘어섰다. 정치적 불안과 재정건전성 악화에 대한 우려가 국채시장을 압박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이 프랑스식 경제정책을 받아들이더라도 프랑스의 재정 실패까지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전략산업에 필요한 정부 개입과 무분별한 재정지출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주장한 유럽의 경제적 자립 필요성은 타당했지만, 재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 역시 진정한 자율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