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권소현 기자]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다.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찾은 곳은 바로 안동 하회마을. 마침 73세 생일을 맞은 여왕을 위해 가장 한국스러운 전통 생일상이 차려졌다. 상차림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조옥화 여사가 주도했다. 우리음식연구회 회장, 궁중음식연구원 이사 등을 지낸 조 여사는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생일상을 차려냈다.
그로부터 20년 후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안동을 찾아 여왕이 걸었던 여정을 그대로 걸었다. 이번엔 20년 전 조옥화 여사를 도와 상을 차렸던 딸 김행자 여사가 앤드루 왕자에게 대접할 상을 똑같이 재현했다. 상차림 돕는 일도 대물림됐다. 이번엔 김행자 여사의 아들인 유호연 국립경국대(옛 국립안동대) 교수가 며칠을 어머니 옆에서 도왔다.
궁중음식도 음식이었지만, 전통방식 그대로 제조한 안동소주에 앤드루 왕자가 감탄하는 것을 지켜본 유 교수는 한국적인 전통주를 세계적인 명품주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봤다.
외할머니부터 어머니까지 2대에 걸친 안동소주 명인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데다 응용화학과 교수인 만큼 화학 지식을 가미해 보다 깊이 있고 편안한 전통주 제조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4년 후 ‘미고리’ 안동소주가 탄생했다.
 | 유호연 국립경국대 교수가 직접 빚어 상품화한 미고리 안동소주를 소개하고 있다. |
|
유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 버팔로에서 전기분석화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기분석화학이란 물질의 변화와 특성을 전기적 속성을 사용해 분석하는 학문이다. 에어센서나 바이오센서를 개발하기도 하고 사람들 날숨으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식이다.
유 교수는 “그간 특정 성분이 어떠한 향과 맛을 내는지 연구해왔다”며 “안동소주를 화학적으로 바꾸기보다 누룩의 양이나 발효의 온도, 기간 등을 통해 맛에 변화를 줬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안동소주가 바로 ‘미고리’다. 쌀 ‘미’(米)에 소줏고리의 ‘고리’를 붙여 만든 브랜드다. 로고도 소줏고리에서 전통주를 제조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미고리 3종 중 금박을 넣은 제품은 ‘미고리 79au’로 이름 지었다. 금의 원자번호인 79와 원소기호인 au를 합한 화학 박사다운 작명이다.
끝까지 누룩 고집…풍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의 비결안동소주 중에서도 미고리는 후발주자인 만큼 맛에서 차별화를 추구했다. 유 교수는 “다른 곳은 입국이나 이스트를 쓰는데 미고리는 누룩을 고집하면서 누룩의 양을 사람들이 싫어하기 직전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며 “이것이 향을 풍부하게 하면서도 맛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술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입국이나 이스트를 써서 만든 술과 누룩을 사용해 만든 술의 맛을 단박에 구별해낸다는 것을 최근 참가한 주류 박람회에서 확인했다. 그는 “외국인이 미고리를 마셔보고는 딱 알아보는 것을 보고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전통방식을 고수해서 만든 술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그래서 앞으로도 손으로 직접 빚는 전통방식을 지켜갈 생각이다. 그는 “기존 안동소주 브랜드가 8개인데 7곳은 스탠리스나 동으로 만든 용기에서 발효하고 증류해서 숙성하는 공장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미고리는 옹기에서 누룩을 발효시키고 옹기로 만든 소줏고리를 이용해 증류해 옹기에서 숙성을 시키는데 이런 방식으로 한 달에 생산할 수 있는 미고리는 200병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농촌산업화자금 지원대상에 선정돼 8월부터 양조장 신축 공사를 시작, 12월에 입주할 예정이지만 양조장을 현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숙성할 전용 옹기를 더 늘리고 소줏고리도 현재 1개에서 3개로 확대해 생산량을 늘리는 정도다. 여전히 아궁이에서 장작불을 떼서 누룩을 발효시키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다.
유 교수는 “소줏고리 한 개를 통해 증류하면 2시간에 3ℓ의 안동소주가 나온다”며 “소줏고리를 두 개 더 추가하면 한 달 생산량이 400병 정도로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미고리 79au, 미고리 안동소주, 미고리 더루츠 등 미고리 제품 라인업. |
|
유 교수는 궁극적으로 미고리를 대량생산하기 보다는 희소성과 가치를 갖춘 명품주로 키울 계획이다.
그는 “초기에는 8개월 정도 숙성한 일반 미고리 안동소주를 판매하면서 점점 장기숙성 물량을 늘려 종국에는 생산하는 물량 대부분을 30년산 미고리로 만들 생각”이라며 “전세계에 얼마 없는 고급 안동소주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미엄 안동소주 브랜드도 정해놨다. 장작불로 누룩을 발효시켜 참나무향이 깃들어 있는 술, ‘화작일로’다. 자개로 꾸민 케이스에 넣어 포장까지도 고가 위스키 부럽지 않게 명품화할 방침이다.
안동 곳곳 양조장…35번 국도 따라 ‘술의 길’ 조성 꿈유 교수의 또 다른 꿈은 미고리 양조장을 문화의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전통주 제조과정을 보면서 직접 술을 빚어보기도 하고 시음도 할 수 있는 체험 공간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폐교를 활용한 전통주 특화 종합문화공간도 생각 중이다.
안동시 감애리를 지나는 안동 35번 국도를 따라 ‘술의 길’을 만드는 것도 그의 로드맵에 포함돼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를 모티브로 만든 이육사 와인을 비롯해 밀맥, 일엽편주, 맹개마을까지 35번 국도를 따라 35km에 이르는 길에 양조장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근방에 전통주 홍보관만 해도 3개나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하듯 전통주 양조장 투어 상품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대전이 성심당 하나로 빵의 도시가 된 것처럼 안동도 술로 브랜딩을 하는 것이다.
유 교수는 전통주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다양하지만 진정한 전통주에 대한 차별화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통주 브랜드가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대부분 한국가양주협회, 막걸리학교 등에서 표준화된 주조법을 배워서 만들기 때문에 차별화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진짜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술은 문화재로 봐야하는 데 독일제 스태인리스를 수입해서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제품과 같은 범주에 넣고 지역 특산물이라고 하면 전통의 의미가 퇴색된다”며 “세금이나 원재료인 쌀 매입에 있어서 좀 더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