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세형 기자] 한 세기를 갓 넘긴 우리나라의 기업 역사. 늦은 산업화로 인한 짧은 연혁 속에서 기업들은 탄생과 부침, 비상과 명멸을 거치는 동안 2세를 넘어 3세, 심지어는 오너 4세를 맞는 경우도 등장하고 있다.
삼성그룹과 CJ, 신세계 등 범삼성가와 현대차그룹이 이미 3세 체제에 진입하고 있고, OCI와 효성, 현대백화점 등에서도 3세 경영인에게로 서서히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모습이다. 3세 경영인의 능력 못지 않게 관심을 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그룹의 순조로운 경영권 승계 여부다.
짧은 역사지만 후세로 경영권이 넘어 가면서 가족간 분쟁 또한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잘 운영되던 형제간 공동 경영이라 할 지라도 경영상 이견이 발생하면서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등을 돌린 경우도 많다. 가족간 분쟁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형제 사이, 삼촌과 조카, 사촌 등 짜맞춰 볼 수 있는 모든 가족간 조합에서 발생하고 있다. 패밀리 전쟁에서도 승리의 법칙은 있다.
아버지 이기는 아들 없더라
경영권을 둘러싼 패밀리 전쟁은 역사상 봉건시대 왕권을 둘러싼 싸움과 판박이라 할 만하다. 흔한 게 부자간이나 형제간 다툼이다. 기업 분쟁에서는 대부분 창업주인 아버지를 이기기는 힘들어 보인다. 삼성그룹이 그랬고, 현대그룹이 그랬다. 동아제약에서도 아들이 아버지를 꺾지는 못했다.
삼성그룹은 1970년대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그룹 후계자로 낙점되자 먼저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장남과 차남이 반기를 들었다. 이들 중 하나는 청와대에 아버지를 고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살아 계신` 아버지의 벽을 결코 넘을 수는 없었고 그룹의 일부만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00년 벌어진 현대그룹 왕자의 난 역시 왕 회장이라 불리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밀던 다섯째 아들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승리로 끝이 났다. 현대그룹은 건설 쪽에서 출발, 건설 쪽을 넘겨 받는 이가 적통이라 할 만하다. 장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아버지를 넘지 못하고 현대차를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 회장 직함을 떼였고, 11년이 지난 올해초에서야 현대건설을 인수하고 현대그룹의 본산인 계동사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아제약의 분쟁 역시 아버지의 승리로 끝났다. 한때 동아제약에서 사장과 부회장직을 수행했던 차남 강문석 현 디지털오션 사장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 강신호 회장의 소홀함과 기업가치 개선을 내세워 강 회장과 셋째 아들 강정석 현 동아제약 대표이사 공격에 나섰다. 한국알콜산업을 우군으로 삼아 주주총회 대결까지 갔으나 막판에 뜻을 꺾었다. 아버지들이 대부분 창업주였고 회사와 동일시되던 상황에서 단지 그의 아들로 태어나 회사 경영을 도와 왔다는 것만으로 기존의 아버지 세력들을 이길 수는 없었던 셈이다.
혈육의 우군을 확보하라
창업자가 사망, 유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도 가족간 분쟁은 빈발한다. 서로 공동경영을 하다가 사이가 벌어져 결국 싸움 끝에 갈라서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에는 숫자가 많은 쪽이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지난 2005년 7월 두산일가에서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발발했다. 두산 일가는 가족회의를 열고 그룹 회장을 차남 박용오 회장에서 셋째 아들 박용성 회장으로 전격 교체하고 박용오 회장을 집밖으로 내쫓았다. 자기 자식을 챙겨 주려던 것이 분쟁 요인이었다.
박용오 회장이 이에 불복, 박용성 회장과 다섯째 아들 박용만 회장이 20년간 2000억 원 가까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요지의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 여파로 3명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한 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박용오 전 회장은 성지건설을 인수, 재기를 노렸으나 부동산 경기 침체 속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경제 위기 전 과도한 몸집 불리기로 지난 2009년 사실상 해체 직전까지 갔던 금호그룹도 마찬가지다.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은 2009년 7월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공동경영 합의를 위반해 해임 조치를 단행하고 자신도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박찬구 회장은 이 조치로 결국 금호석유화학을 들고 그룹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박삼구 회장은 작고한 두 형 박성용 명예회장과 박정구 회장의 자녀들과 자신 아들 세창씨 지분을 합해 박찬구 회장의 해임을 밀어 부쳤다.
지난해 대성산업 상장 과정에서 사명 소송이 붙기도 했던 대성그룹은 차남과 셋째 아들이 힘을 합해 장남을 이긴 케이스다. 창업자인 고 김수근 회장은 타계하기 한 해전인 지난 2000년 3형제에게 그룹을 나눠 줬다. 장남인 김영대 회장이 그룹의 모태인 대성산업을, 차남 김영민 회장과 셋째 아들 김영훈 회장은 각각 서울도시가스 계열과 대구도시가스 계열을 물려 받았다.
하지만 서울도시가스와 대구도시가스에 얽힌 지분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발했다. 김영대 회장 측은 해당 지분을 시가의 2∼3배에 사갈 것을 요구했고, 두 아들은 합의서대로 시가에 넘길 것을 주장했다. 이는 차남과 셋째 아들의 대성산업 지분 인수로 이어졌고, 이들이 한때 대성산업 지분 55.07%까
지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경영권이 위협 받게 된 김영대 회장은 결국 합의대로 시가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조그룹에 넘어간 오양수산 역시 장남을 불신한 가족들의 승리였다. 창업자 김성수 회장은 타계 몇년 전인 2003년 장남인 김명환 부회장을 대표이사직에서 끌어내리려 했으나 물리적 충돌로 실패했다. 이후 가족들은 장남을 불신하게 됐고, 상속지분을 경쟁업체인 사조산업에 보유 지분을 넘기게 된다. 김명환 부회장이 모자간 소송에 돌입했으나 소송에서도 지면서 결국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여자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
이성간 대결에서는 여성이 우위를 점하는 것처럼 보인다. 2003년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뒤 범현대가에서는 며느리가 이어받은 현대그룹을 인정치 못하겠다면서 그룹 경영권에 도전한다. 일례로 숙부인 정상영 회장이 이끄는 KCC와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지만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승리로 끝났다.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으로 경영권 불안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섣불리 현대그룹을 건드릴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진그룹의 경우 창업자 조중훈 회장 타계 이후 4형제가 각기 짝을 지어 서로 싸우며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했다.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셋째 아들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동맹을 맺었고,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넷째 아들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이 힘을 합쳤다. 그런데 지난 2006년 셋째 아들이 별세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된다. 한진그룹이 셋째 아들 몫인 한진해운에 욕심을 내고 있다는 소문이 돈 것.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아내인 최은영 회장이 당시 전업주부였던 데다 계열분리도 되지 않았던 것이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한진그룹과 한진해운 둘 다 그 같은 가능성을 일축했고, 최은영 회장은 지난 2009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경영권 분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제기한 측에서는 이를 최은영 회장의 확고한 그룹 지키기의 표현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또 한진해운은 그 해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분쟁의 가능성도 대폭 줄여 놨다.
지난 1996년 창업주 고 윤익성 회장 타계 후 벌어진 레이크사이드CC 분쟁에서도 여성의 활약은 대단했다. 창업주 사망 이후 레이크사이드CC 경영권은 차남 윤맹철 전 회장에게 넘어갔다. 윤 전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형제 중 가장 많은 20%의 지분을 물려받았고, 일본 쇼우난씨사이드CC 명의로 돼 있던 지분 30%도 국내 대출금을 갚는 조건으로 함께 받아 50%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셋째 아들 윤대일씨와 큰 딸 윤광자씨가 쇼우난씨사이드CC 명의 지분 30%을 상대로 제기한 법정상속분쟁에서 승리하면서 9%의 지분이 이들에게 넘어갔고 여기에 윤 전 회장의 형수인 석진순씨까지 이들에 가세하면서 경영권을 뺏긴 바 있다.
승계 진행되고 있는 기업들은
후계 승계는 여전히 재계의 뜨거운 화두다. 승계작업이 진행중인 대그룹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이서현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이 승진하면서 그룹 분할을 통한 3세 승계 작업이 본격화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재용 사장이 삼성전자 등 전자 계열사와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까지 그룹의 대부분을 물려 받을 것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 오빠와 달리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부진 대표의 행보는 이목을 끌고 있다. 2001년 호텔신라 부장을 시작으로 경영에 발을 들여 놓은 뒤 에버랜드에 이어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에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혀 왔기 때문이다. 세 자녀간의 에버랜드와 삼성SDS 지분 정리가 끝날 때까지는 지배구조가 확정됐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평가다.
범삼성가인 신세계는 현재 진행중인 회사 분할을 계기로 3세인 정용진 부회장과 동생 정유경 부사장이 독자 행보를 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정용진 부회장은 대형마트 부문을, 정유경 부사장은 자회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을 포함한 백화점 부문을 각자 경영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상장심사를 청구하는 과정에서 그룹 상층부에서 이견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있다.
SK그룹의 경우엔 최태원 회장과 사촌지간인 최신원 SKC 회장이 계열분리를 공언하고 있어 주목해 볼만하다. 최신원 회장은 그룹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의 아들로서 계열분리를 언급하면서 미미한 지분이지만 SK증권과 SK네트웍스 지분을 지속적으로 사들이고 있고, 지난 3월 SK네트웍스 주주총회에 12년 만에 참석해서는 "창업주에 대한 묵념도 없고 성의없이 진행되면서 창업정신이 흐려졌다"고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근 장남이 인수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던 효성은 철저한 균등분할 원칙이 있는 곳이다. 지난 해 말 인사에서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의 부회장 승진 등 3형제의 승진이 예상됐을 정도로 승계가 임박해 보인다.
현재 장남 조현준 사장은 전략본부와 섬유, 무역 부문을, 차남 조현문 부사장은 중공업 부문을, 삼남 조현상 전무는 산업자재 부문을 나누어 맡고 있어 균등분할의 원칙이 지켜질 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제3호 마켓in`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제3호 마켓in은 2011년 5월2일자로 발간됐습니다.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 : 02-3772-0381, bond@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