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지영의 기자]“이제는 지방 공사채 신용평가에 도지사 성향 분석까지 해야 하나”
강원도지사의 말 한마디로 자본시장에서 두려워하던 신용경색이 발생했다. 강원도의 강원중도개발공사(GJC) 회생 신청에 따른 채권·금융시장의 충격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모양새다. ‘정부 보증’이면 당연히 안전하다는 믿음이 깨지면서 지자체가 신용보증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상황이다. 국내 13개 지자체가 보증을 선 대출만 1조 701억원. 레고랜드 사태 이후 시장에서 지자체 보증 채권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취급을 받게 됐다. 신용 리스크는 이미 다른 지자체로 번지고 있다. 경기도 과천도시공사, 인천도시공사 등의 공사채 발행에서 목표 자금 모집 실패가 잇따르는 상태다. 지자체 보증에 대한 시장 불신이 깊어져 강원도 춘천시 산하기관인 봉명테크노밸리가 기존 채무 이자를 두 배로 물게 되는 사례도 생겼다.
뒤늦게 나선 정부가 강원도의 채무불이행 시도로 불거진 시장 충격을 수습하려 나섰으나 신뢰 회복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지방 정부 연대보증 관련 신용평가 제도를 개선하고 지자체장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채무불이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도지사 바뀔 때마다 채무불이행 터질라”…시한폭탄 취급 받는 지자체 보증사업행정안전부가 레고랜드 사태로 불거진 시장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보증현황을 조사한 결과 13개 지자체가 총 26개 사업에 1조 701억원을 보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행안부는 점검 결과와 함께 △지자체 채무보증 사업의 추진 상황 분기별 점검 △관련 사업 지연 규제 발굴 및 해소 △각 지자체에 상환기일을 고려한 여유 재원 확보 및 보증채무 이행 당부 등의 리스크 최소화 방안을 함께 밝혔다. 이밖에 보증채무 사업에 대해서는 엄격한 중앙투자심사를 실시하여 부실 사업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정부가 대책을 내놓으며 시장 달래기에 나섰음에도 한번 깨진 신뢰를 온전히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지자체 보증 사업에서 레고랜드 사태와 같은 채무불이행이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쉽게 걷히지 않는 양상이다. 선거로 정부 수장이 교체될 경우 정치적인 판단과 결정 하에 전임자의 사업을 백지화하거나 방식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자체 보증사업에서도 제2, 제3의 레고랜드 사태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다.
SRE자문위원은 “훼손된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레고랜드 사태의 파장을 봤으니 당분간은 강원도와 같은 의무 미이행 사례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런데 이건 말 그대로 당분간”이라며 “금융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불확실성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지자체 선거 결과에 따라 금융계약이 뒤집어질 수 있다는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를 심어놓게 됐다. 이번 정부하에서는 그대로 가더라도 다음 선거 때 지자체장이 바뀌면 어떻게 굴지 모른다는 거다”라고 지적했다.
‘묻지마 신용부여’ 관행 개선 요구 목소리도…독자신용등급 필요성 거론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차체 산하 개발공사 관련 대출 채권에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관행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방정부가 연대보증 대출채권이나 해당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유동화물은 통상 해당 지자체의 신용도에 연계해서 동일한 신용등급을 부여받는다. 그동안 지자체의 보증은 신용평가사들이 ‘묻지 마’ 평가를 하게 할 만큼 그만큼 절대적인 요인이었다. 이같은 관행으로 인해 준비 단계부터 미래가치와 사업성에 대해 불확실성이 높은 사업도 지방정부 보증물이라는 이유로 최상위 신용등급을 달고 자금을 조달해왔다는 것이다. 한국신용평가와 서울신용평가가 레고랜드 사업 관련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A1을 부여한 배경이다.
SRE자문위원은 “국내에서는 지자체는 사실상 중앙정부와 한 몸으로 보는 평가 기조가 있었다. 당연히 신뢰가 따랐던 이유”라며 “레고랜드의 경우에도 강원도개발공사가 돈이 부족하면 ‘강원도가 도와줄 수 있다’는 식으로 되어 있었으면 그 어떤 기관도 투자 하지 않았을 거다. 강원도의 ‘보증’이 있었기 때문에 투자가 들어간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자체 산하 개발공사 및 관련 대출채권 신용평가에서 지방 정부의 신용등급이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SRE자문위원은 “지금 지자체 산하 개발공사들이 일반적으로 AA+ 등급을 부여받고 있는데, 그 근거가 대부분 지자체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며 “그런데 한 번 더 보증을 선다고 해서 AAA+로 올리는 것이 합당한 조치인가. 경제적 실질은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무리하게 근거를 중복해가며 높은 신용등급을 줘왔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대안으로 ‘독자신용등급(stand-alone rating)’을 도입할 때라는 주장도 나온다. 독자신용등급이란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증을 제외한 상태도 따로 평가해 개별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체계하에서는 사업성에 대한 평가를 반영한 등급, 지자체 보증을 감안한 등급을 모두 제공해 두 개의 신용등급을 보유하게 된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사업성이나 재무 상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데에 있어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목적이다. 독자신용등급을 도입해 평가제도를 개편하면 지자체 사업의 사업성 검토와 재무안정성 관리가 더 엄격히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
‘김진태 방지법’ 논의도…지자체 보증 의무 이행시킬 ‘법적 근거’ 마련 움직임지자체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채무불이행을 막을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야당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 대책회의에서는 유사한 채무불이행이 발생할 경우 일정 기간 지방채 발행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또 논의안에는 지방채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을 기존 행안부에서 금융위원회에 주는 방안도 포함된 상태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의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김진태 방지법’ 발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방자치단체가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지방채와 관련한 조치를 할 경우, 금융당국과 협의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33회 SRE(Survey of credit Rating by Edaily) 책자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