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허지은 기자] 경영권 분쟁 때마다 재계 오너들 사이에 등장하는 이른바 ‘백기사 동맹’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단순한 지분 매매를 넘어 교환사채(EB) 발행, 전략적 재매입 등 복잡한 금융 기법을 동원해 각자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헤쳐모이는 식이다. 최근 호반의 공격을 받은 한진그룹과 LS그룹이 맺은 ‘반(反) 호반’ 동맹이 대표적이다. 재벌 중심의 기업 환경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연대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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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재계 및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LS(006260)는 채무상환자금 조달을 위해 대한항공을 대상으로 65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를 발행한다. 해당 교환사채는 대한항공이 인수해 5년 내로 LS 지분 1.2%로 바꿀 수 있다. LS는 이번 자금으로 만기가 임박한 산업은행 차입금 약 1000억원을 상환할 예정이다. 하지만 재계에선 이번 발행이 단순 재무구조 개선 목적이 아닌 호반을 견제하기 위한 연대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고려아연(010130) 역시 위기에 빠진 한진그룹에 조력을 줬다. 호반과의 지분 격차가 1.5%포인트로 좁혀지자 한진칼은 보유 중인 자사주 0.66%를 사내복지기금에 출연하고 4년 전 고려아연에 팔았던 정석기업 지분도 되사왔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복지기금에 출연하면 의결권을 부활시킬 수 있고, 정석기업은 한진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에 있는 기업인 만큼 지배력 강화 목적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2021년 한진 오너 일가는 한진 오너 일가는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정석기업 지분 12.22%를 고려아연 측에 팔았다. 고려아연은 해당 지분을 481억원에 샀다. 4년 만에 되팔기로 한 금액은 521억원으로, 그동안 고려아연이 배당으로 챙긴 40억원 가량을 더해 80억원 상당의 차익을 남겼다.
한진, LS, 고려아연. 이들의 공통점은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한진과 LS는 호반그룹을, 고려아연은 MBK파트너스와 영풍을 상대로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다. 창업주 별세 후 오너 2~3세 경영을 진행 중이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오너 일가가 상호 경영권 방어를 위해 전략적 연대에 나섰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앞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당시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분쟁 발발 직후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회동을 가졌다. 한화는 고려아연 지분 7.76%를 보유한 주요 주주로, 2022년 고려아연과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 차원에서 자사주 맞교환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지난해 11월 고려아연은 보유 중이던 ㈜한화 지분 7.25%를 한화에너지에 넘겼다. 한화에너지는 김동관 부회장을 비롯한 3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한 가족 회사로, 사실상 고려아연이 한화 3형제의 지배력 강화에 기여한 양상이 됐다. 고려아연은 지분 매도로 약 1500억원의 유동성과 한화라는 우군을 확보했고, 한화는 승계 조력을 받은 ‘윈-윈’으로 평가된다.
그밖에 한진칼의 백기사로 나섰던 델타항공, 삼성물산과 HD한국조선해양 지분을 매입해 오너 일가를 지원한 KCC, 경영권 분쟁에 빠진 샘표식품 지분을 사들이며 간접적으로 힘을 보탠 풀무원 등이 기업 간의 백기사로 알려진 사례다.
이같은 백기사 동맹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엇갈린다. 재벌 위주의 국내 환경에서 경영권 안정이 곧 기업의 안정이고, 장기적인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반면 시장 교란이자 담합, 사적 이익의 수호 수단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일종의 파킹딜이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공정거래위원회는 총수 일가의 우회 지분 거래, 우호 지분 활용 등에 대해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우호 지분을 빌려주고 되사오는 방식이 사익 편취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기업 간의 연대가 명시적인 불공정거래로 규정되긴 어려워, 법적 판단보다는 시장의 해석과 압박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지배구조가 안정되면 경영도 안정되고, 장기적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도 “해당 지분 투자 과정에서 회삿돈이 활용되는 만큼 배임 이슈가 불거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